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神文王) 9년(689)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을 두고 성을 축조하여 다시 있을 수 있는 북방의 내습에 대비하고 있었음.
그 후 81년 뒤인 혜공왕(惠恭王) 6년(770)에 왕이 서원경을 순행하게 되었는데, 왕이 순행한다는 전갈을 받은 성주는 왕을 맞을 준비를 해 놓고 왕의 행차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요로에 연락군을 파견하였음.
혜공왕이 조항산성(鳥項山城)을 출발하였다는 파발을 받은 지 하루 해가 넘어갈 무렵 성안에 횃불을 밝혀 놓고, 행차를 안내하던 의전관이 때마침 전갈군이 들이닥치자 “왕께서 지금 어디쯤에 계시냐?”고 물어 보았음
그러자 전갈군이 말하기를“왕이 타신 연이 지금 큰 마을에 이르셨다.”라고 하였고, 이어“왕의 가마가 작은 마을에 이르셨다.”라고 알려져 옴
이에 비로소 성주가 의전군을 인솔하고 왕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달려가 서원경 성으로 안내하기에 이르렀음
왕의 가마가 있는 곳 이라고 해서 큰 마을을‘큰 가재골’, 작은 마을을‘작은 가재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후‘가재’가 ‘가좌’로 와전되어‘큰 가좌골’,‘작은가좌골’로 불리게 되었음
황성골
‘황성곡’(皇城谷)이라고도 불리는‘황성골’은 광덕사 앞에서 우암산 토성 남쪽 문턱에 이르는 계곡을 말함.
통일신라 시대 목암산에 성을 쌓아 올리고 있던 사역두(仕役頭) 한 사람이 남쪽에 문을 내고 나서 경주에서 행차하는 왕의 어가(御駕)를 어느 쪽으로 맞을까 하고 고심을 하기 시작했음.
그러던 어느 날 남쪽산 기슭 양지 바른 잔디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한 줄기 광채가 서쪽으로부터 뻗치면서 “역두는 이 빛깔을 따라 황성으로 이르는 길을 닦도록 하라.”는 부처님의 계시를 받고 깜짝 놀라 광채를 살피니 그 빛은 계곡을 따라 능선 쪽으로 뻗치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서서히 없어졌음.
이어 홀연히 깨달은 역두는 곧 역사를 동원해서 광채가 멎었던 계곡을 따라 왕의 가마를 맞을 길을 닦고 임금을 성안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계곡에는 길을 내는 동안 흰 구름이 항상 감돌고 있어 일하는 역사들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음.
그 후에 역두가 잠자던 잔디 자리에 조그마한 암자를 지었는데, 빛이 뻗었다 해서 광덕암(光德庵)이라 불렀다가 그 후 규모가 커지면서 오늘의 광덕사로 불리게 되었음.
그리고 흰 구름이 서리던 계곡 길에 세워진 절은 백운사(白雲寺)라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음.
또 다른 설로는 역두가 성밖 잔디에서 자고 있는데 어떤 스님이 지나가며 하는 말이“황성으로 가는 길이 편해서 좋구나”라고 하면서 역두의 발을 밟고 지나갔다 하여서‘황성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짐.
서답골
‘서답골’은 우암산에 있던 골짜기로써 지금의 삼일아파트와 한신신세대아파트 사이를 말함
‘서답골’이라는 지명은‘서답’과‘골’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음
‘서답’은 충청 방언에서는‘개짐’(월경 때 샅에 차는 헝겊)을, 평안?경상? 제주 방언 등에서는‘빨래’를 뜻하는 말임
‘서답골’의‘서답’은 일반적인 의미인‘빨래’로 해석 되어짐
‘골’은‘골짜기’란 뜻으로써‘서답골’은‘빨래를 하는 골짜기’로 해석 되어지고 있음
아마도 주변 마을 아낙들이 이곳 골짜기에 모여 빨래를 했기 때문에‘서답골’ 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음
‘서답’을 이용한 지명으로는‘서답골’이외에‘서답나드리’,‘서답바위’, ‘서답보’ 등이 있는데 이는‘빨래를 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공통으로 쓰여짐
먹바위
‘먹바위’는 지금의 청주대학교 내에 있는 바위로써‘먹’처럼 시커먼 색을 띠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임.
옛날에는 이 바위 위에서 동네 아낙들이 모여 빨래를 했다고 전해짐
명암약수터
인근에 사는 한 마을 사람이 어느 날 하늘의 선녀들이 하늘나라에서 계곡 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는 꿈을꾸게 되었음.
그가 꿈에서 깨어나 그 곳을 찾아가 보았는데 백발 신선이 어떤 자리를 가리키고 있어 그 곳을 파보니 약수가 솟아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짐.
또한 옛날 청주고을 박생원의 출가한 딸 초순이가 이곳에서 요양을 하면서 약수를 마시고 중병을 치료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약효가 있는 샘물’ 이란 뜻을 가진‘약수’라 했다고 함.
< 1971년의 명암약수터 >
< 명암타워 >
< 명암호수 >
표충사
충절(忠節)의 고장 청주에서는 많은 충신(忠臣)열사(烈士)가 나왔음.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義兵)을 일으켜 싸웠으며, 3ㆍ1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이 고장에서 6인이 나왔음.
하지만 충신이 많이 나오는 고장에는 역적이 이었기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 할 수 없는 일로써 조선영조(英祖) 4년(1728년)에 청주에서 반란(反亂)이 일어났음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청주 인근의 괴산군 청천면 송면 사람 이인좌(李麟佐) 로 본관이 광주(廣州)이며, 영의정 준경(浚經)의 후손인데 영조의 즉위로 노론이 권세를 잡고 소론이 밀려난 것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음
그 때 영장 남연년을 비롯한 충신들이 항복하지 않은 이유로 적도들에게 살해당함
이 사건에서 비장 홍림의 애첩 해월의 이야기가 우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해월은 홍림이 난중 병사 이봉상을 대신하여 죽자 반군에게 청하여 홍림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지냈다고 함
또한 홍림의 유복자를 나아서 7세까지 정성들여 키웠으나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따랐다고 함
그 후 반란이 진압되자 이봉상, 남연년, 홍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조 7년 (1731년)에 청주읍성 북문 안에 사당을 지었음
또한 영조 12년에는 사액 되었는데 1939년 도시계획에 따라서 현 위치(청주시 상당구 수동87)에 이전하 고, 1977년 12월 6일 기념물 17호로 지정되었음
이 사당이 표충사(表忠祠) 또는 일명 삼충사(三忠社)임
표충사에는 해월의 열녀(烈女) 정문(旌門)이 있고 해월의 무덤은 표충사 뒤 인근 우암산에 깨끗이 남아있음